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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카츠>  Ti amo (전연령.ver) By 노아 (@ddengi514)

- 신학적 지식이 낮은 편입니다. 이 점 고려하여 읽어주세요.

- 전체 이용가용 글은 일부 장면을 제거한 관계로 글에서 문단 간 어색함이 다소 있을 수 있습니다.

 

영주가 지배하는 넓은 마을의 작은 교회. 그곳에서 유리는 목사로서 신을 섬기고, 신의 말씀을 전하였다. 마을에는 규모가 큰 주교회가 있었고, 상대적으로 조촐한 작은 교회가 네다섯 개 있었다. 주교회에는 1명의 목사가 마을의 교회를 통솔했고, 그 밑에는 몇 십 명의 목사가 있었다. 그에 비해, 다른 교회는 목사가 두세 명 정도 있었고, 평민들에게 신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탁. 개인 숙소에 문을 완전히 닫고 들어온 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목사의 일은 고됬지만, 그는 일정을 하나씩 끝낼 때마다 개인 숙소로 들어오는 것이 즐거웠다.

“빅토르.”

유리가 느지막이 부르는 말에 옷장에 꽁꽁 숨어있던 빅토르가 옷장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게 기른 은발에 벽안을 가진 사내. 한 눈에 보아도 잘생겼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미남이었지만, 그는 일반인과는 사뭇 달랐다. 마치 사자(死者)처럼 하얗게 질린 피부. 고양이 눈처럼 타원형인 동공.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핏빛을 머금은 붉은 입술과 압도적으로 큰 윗송곳니가 그랬다.

“늦었잖아, 유리.”

“미안해요. 오늘은 세례를 받아야 할 아이가 좀 많아서.”

긴 은발의 사내는 앳되어 보이는 얼굴로, 많아봤자 스무 살 정도로 보였다. 조금의 원망을 담은 얼굴은 금세 ‘배고팠다구.’라며 툴툴대었다. 하지만 유리는 그를 위해 빵 한 쪼가리도 갖고 오지 않았다. 어차피 갖고 와도 그는 먹지 못한다.

“얌전히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이제 식사 시간이야.”

톡, 톡. 신부복을 벗어던지고, 셔츠까지 단추를 끌렀다. 살짝 드러난 목덜미와 어깨는 가을 햇빛을 받아 선명한 살굿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조금은 기대하는 듯 보이는 그의 얼굴은 살짝 붉었고, 그 붉은 기운은 목덜미까지 선명하게 내려와 있었다.

어느새 성큼성큼 다가온 그는 유리의 얇은 셔츠자락 위로 팔을 감아 허리를 안았다. 그는 부드럽게 빅토르의 등에 손을 얹었고,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생살을 가르는 고통에 유리는 작은 신음 소리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유리와 그의 인연은 약 3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의 말씀이 전부이고, 과학과 철학마저도 신의 시녀로 두는 이 시대에서 흡혈귀는 마치 악마의 형상을 닮았다 하여 천대받고 무시당하였다. 흡혈귀였던 빅토르가 이전에 살던 집에서 쫓겨나 도성 이곳저곳을 떠돌다, 결국은 지쳐 쓰러진 곳이 유리가 있는 교회의 밭이었다. 밤에 교회의 밭에 나와 바람을 쐬고 있던 유리가 그를 발견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가 잠들어 아무도 없는 교회 복도에서 유리는 낑낑대며 그를 업어 자신의 방 안으로 데려왔다. 자신의 좁은 침대 위에 눕히고, 적신 수건으로 그의 얼굴과 몸을 꼼꼼히 닦아내었다. 굳이 촛불에 불을 당기지 않아도, 얼음장 마냥 푸르게 빛나는 만월의 달이 그들을 비추었더랬다.

그 이후로, 유리와 빅토르의 비밀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도 처음에는 빅토르가 흡혈귀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흡혈귀에 관한 지식이 거의 전무했으니까. 빅토르는 며칠 동안 그가 몰래 챙겨오는 음식을 거부하다, 흡혈 충동에 못 이겨 유리의 목덜미를 탐했을 때 유리는 처음으로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발기한 자신의 성기를 처음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 길로 화장실에서 자신을 수도 없이 매질했었다. 성직자에게 성욕은 수치스러운 것이요, 죄악이었다. 하지만 빅토르는 그의 매질에 놀라 다급하게 그를 막았다. 매질을 하던 유리의 얼굴은 고통에 눈물범벅이었다. 붉어진 눈가에서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는 유리의 모습에 그는 심장이 내려앉는 듯 했다.

그들이 처음으로 몸을 섞은 것이 그때였다. 이후에야 유리는 흡혈귀들의 타액에 미약 성분이 들어있다는 것을 교회의 도서관에서 흡혈귀 관련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흑, 으‥.”

피가 빠져나가는 나른한 기분에 유리는 힘없이 그에게 안겼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를 받아 안은 빅토르는 꽤 허기 졌던 모양인지, 그대로 그를 침대에 쓰러뜨렸다. 목덜미로 피가 쏠리는 기분에 온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무리 그에게 피를 내어줘도 유리는 이 감각만큼은 익숙해지지 않아 움찔거리며 몇 차례 몸을 떨었다.

“아‥! 빅, 토르. 그만, 힉…!”

벌써부터 미약 기운이 돌기 시작하는지, 붉어진 얼굴로 움찔거리며 두 팔로 빅토르를 밀어내었지만 힘이 쪽 빠진 팔로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식사시간을 가지고서야, 빅토르는 그의 뺨에 쪽, 하고 입술을 놓았다.

“유리, 흥분했어?”

그의 위에서 유리를 끌어안은 채로, 빅토르가 여유 있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유리의 몸은 점점 열기를 띄며 숨이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유리.”

“흐‥. 하아…. 네?”

“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말해도 좋아.”

그의 이성이 조금씩 흐려지고, 머릿속은 점점 어떤 생각도 담아내지 못했다. 그저 안기고 싶다고. 자기를 안아달라고 빅토르를 보챌 뿐이었다.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이마냥 그에게 찰딱 달라붙어 몸을 배배 꼬는 유리가 빅토르는 참을 수 없이 귀여웠다.

“옷, 정리 해야지. 신부복은 구겨지기 쉬우니까. 이따가 입고 나가야하고.”

그의 속삭임에 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됐으니까‥. 빨리, 응?”

자신의 목에 팔을 두르고 애원하는 모습에 그의 이성도 흐릿해졌다. 그를 품에 안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자 유리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눈을 감았다.

유리는 주님을 모시는 신부였다. 깨끗한 몸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오직 주님만을 담아야만 했다. 빅토르에 의해 더럽혀지고, 그의 색으로 물들어 버린 유리가 이 몸으로 신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인지 그는 수도 없이 고민했다.

그의 고민과는 상관없이 빅토르는 하루에 한 두 번씩 유리의 피를 마셔야만 했고, 그럴 때마다 정신을 차려보면 그의 밑에서 한참을 울고 있었다. 하지만 유리도, 빅토르도 누가 먼저 사랑한다고 이야기 한 적은 없었다. 교회의 신부가,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서는 안 돼는 일이었다. 그것을 유리는 잘 알고 있었고, 빅토르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생각이 모순인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리는 이런 것이라도 지키지 않으면 성직자로서의 마지막 규율까지 박살낼 것만 같았다.

 

“유-우리.”

“응?”

두세 번의 정사 후, 빅토르가 애널에 품고 있던 정액을 빼주고 몸을 닦아주자 유리는 비척비척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한명이 들어가는 좁은 침대에서 빅토르는 바지만 입은 채, 눈을 대록대록 굴리며 유리가 하는 양을 빤히 바라봤다.

“나, 이 교회 이제 나가야 할 것 같아.”

멈칫. 몇 십 개의 단추를 잠그던 유리의 손이 멈추었다. 그를 이 방에 처음으로 데려왔을 때, 치료를 할 때까지 빅토르는 흡혈욕구를 참지 못했고, 유리는 미약성분 덕분에 차오르는 욕구를 참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에게 마음이 동하였고, 서로가 마음이 동해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헤어지는 것을 바랄 리가 없었다.

“…왜, 갑자기?”

“그야, 이렇게 있다가는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인걸. 나는 어떻게 되던 괜찮지만, 신‥부, 가. 그것도 남자에게 안겼다니. …화형감이야.”

유리도 알고 있잖아. 덧붙이는 그의 얼굴은 덤덤했다. 그들도 알고 있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입에 올리지 않았던 말들이었다. 가만히, 타들어가는 시계양초를 바라보던 그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나가면, 나랑 만나기 전의 생활이 계속 될지도 몰라요.”

“상관없어. 난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죽을지도 몰라요. 빅토르, 나 만났을 때도 내가 없었다면 죽었을 거예요.”

“알고 있어.”

“‥다시는. 다시는 나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어요.”

“…….”

유리의 마지막 말에,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빅토르는, 내 피 없이 살 수 있어요?”

“…….”

“‥나…. 없이도. 살 수 있어요?”

“‥‥아니.”

느지막이 흘러나온 그의 대답에, 빅토르와 등지고 있어 그에게 보이지 않는 유리의 얼굴은 아주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어차피 빅토르는, 내 피가 없으면 살 수 없잖아요. 내 피만 마셔서, 다른 사람 피는 성에 차지 않잖아.”

3개월 내내 빅토르는 유리의 피만 마셔왔다. 신을 섬기는 몸이라며 갖가지 더러운 음식을 먹지 않는데다 단 한 번도 더러웠던 적 없는 몸 덕분에 그의 피는 빅토르에게 만찬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교회를 나올게요. 그때는 정말 시골에서 둘이서 살아요. 응? 그 방법밖에는 없어요.”

되도 않는 이야기였다.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성직자가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을 교회가 반길 리가 없었다. 또한, 사람들의 온갖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신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이곳의 영주보다 더한 권력을 갖고 있었기에, 그 권력을 자진해서 포기하는 그가 정상으로 보이진 않을 터였다.

단추를 전부 채운 유리가 뒤돌아,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시체처럼 차가운 뺨에는 유리의 손을 따라 작은 온기가 내려앉았다.

“따뜻해.”

그가 가만히 눈을 감고, 유리의 손의 온기를 느꼈다. 유리는 있지, 유리의 손도 따뜻한데 피도 따뜻해. 산뜻한 맛이 나. 알아? 그의 말에 유리가 실없이 웃었다. 정말?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빅토르가 괜찮다면.

“내 모든 피는 빅토르에게 줄 수 있어요.”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빅토르의 위에 유리가 올라탔다. 이번엔 유리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빅토르의 허벅지에 유리가 몸을 실었고, 두 손으로 그의 양 볼을 감쌌다. 유리의 목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가 빛을 수 갈래로 반사했다.

“대답해줄래요? 내가. 주님을 섬기는 것을 그만둔다면, 내 손을 잡아줄 건가요?”

마치 바다와도 같은, 동시에 하늘과도 같은 푸른 두 눈동자가 유리의 눈을 마주했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그의 속눈썹은 짙고 풍성했다. 그의 눈꼬리가 천천히 접힌다. 그는 유리의 허리에 팔을 감아 받치고, 한 손으로는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 막무가내 신부님을 어쩌지.

“…얼마든지.”

그에게서 나온 건 작은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이 실현되었을 때 빅토르의 죄책감의 정도는 유리도 알고 있었고, 빅토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었다.

 

“오후기도 나가셔야지요. 신부님. 그리고 다음 일정도 있잖아?”

빅토르는 침대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던 유리의 ‘뽀뽀해주면 일어날게요.’ 한 마디에 웃음을 흘렸다. 허리를 숙여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었다. 나이는 자기보다 더 많은데, 어째 빅토르 자신이 더 어른스러운 것 같았다.

“응…. 금방 올 테니, 갑갑해도 나오면 안돼요. 오후 3시마다 아이가 청소하러 오는 것. 잘 알고 있죠?”

“응. 유리가 이 시간쯤 되면 말해준다고 외우고 있을 정도인걸.”

그의 말에 유리가 어깨를 으쓱, 하며 한 번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교회의 복도로 통하는 방문 앞에서 그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다녀올게요.”

 

유리의 기도실. 십자가 목걸이를 손에 말아 쥐고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평일 오후의 교회는 특별하게 들르는 민간인도 없었고, 교회의 목사들은 유리처럼 각자의 개인 기도실에 들어가 기도를 올리고 있어 건물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목사님.”

문이 발칵 열리며 그와 같은 신부복을 입은 남자가 그의 신부실로 들어왔다. 기도를 올리던 유리가 남자를 바라보고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형제님. 적어도 노크정도는 하고 들어와 주세요.”

“아, 실례했습니다.”

그가 고개 숙였지만, 사실 유리가 이렇게 말해도 그는 또다시 노크 없이 들어올 것을 유리는 알고 있었다. 그가 품에 넣어두었던 작은 편지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봉투 앞에 찍힌 씰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교회에서 온 편지였다.

“주교회에서, 왜…?”

설마 빅토르의 존재가 들킨 건가, 싶어 그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의 존재가 있다고 어느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고, 누군가와 같이 살고 있다는 티조차 내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빅토르의 존재가 주교회까지 알려졌다면 유리가 지금 이 기도실에서 멀쩡하게 기도를 올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악마를 교회에 데리고, 정을 나누며 피를 내어주고 몸까지 섞는 목사가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그때는 정말 파멸이었다. 유리는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린 것 마냥 약하게 손을 떨며 씰을 떼어내고 편지를 읽었다.

“나를 왜…?”

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의 말을 들은 편지를 가져다준 목사는 ‘주교회에서 성직자를 부르는 건 대부분 그 사람을 주교회에 두기 위해서입니다.’라고 귀띔해주었다. 그리고는 살짝 웃으면서, ‘출세하셨네요.’라며 작은 축하의 말을 건넸다. 주 교회에서는 정기적으로 지역 교회를 방문하여 갖가지 교육을 하고, 새로운 소식을 알리는 일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신앙심이 깊고 성실하며, 청렴한 신부를 뽑아 그들의 아래에 두기도 하였다.

“아마 초대장으로 날아온 걸 보면 아마 바로 그쪽으로 옮기라고 할 것 같은데요?”

목사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유리의 어깨를 한두 번 두드리고는 그의 좁은 기도실을 나섰다.

 

“주교회로 간다고?”

하루 일정을 모두 끝내고 방으로 돌아온 유리가 소식을 전하자, 빅토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또한 주교회가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기에,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유리가 건넨 편지를 받아들고 찬찬히 읽던 빅토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교회가 왜 유리를 부르는 거야?”

그의 물음에, 유리는 조곤조곤 설명해주었다. 주교회가 부르는 것이 대개 어떤 이유에서인지. 유리의 말을 들으며 편지를 계속 읽던 빅토르의 표정이 점점 상기 되었다.

“유리, 그런 건 좋은 일 아니야? 더 큰 교회로 갈 수 있는 거잖아.”

하지만 유리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러면… 빅토르는요?”

그의 말에 빅토르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들이 이렇게 지낼 수 있는 것도 전부 유리가 이 교회에서 목사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곳을 떠나 정착하는 동안 빅토르가 있을 곳도 없으며, 새로운 교회에서 또다시 빅토르를 들이기에도 난감한 노릇이었다.

“그러면, 내 말대로 내가 나가야 할 때가 온 거네.”

“‥아니에요. 지금이야말로 내가 신부복을 벗어야 할 때인 것 같아요.”

지금이라도 신부복을 벗어야 눈총을 덜 받을 테니까. 덤덤하게 말하는 유리를 빅토르는 빤히 바라보았다.

“유리, 내가 나 때문에 유리가 이 일을 그만두게 된다면, 내가 기뻐할 것 같아?”

“…아뇨.”

잠시 망설이던 유리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는 살풋 웃으며, 유리의 뺨을 감싸고는 엄지로 입술을 쓸었다. 선명하게 잇자국이 남은 입술에 그는 살며시 자신의 입술을 내리 눌렀다.

“어차피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는 거였잖아, 유리.”

“…응.”

“그리고 유리는, 내가 죄책감 속에서 사는 걸 원치 않을 거고.”

“응‥.”

그럼 이게 맞는 거야, 유리. 그는 귀엽게 솟아있는 유리의 콧등에 키스했다. 그는 거의 울상이었지만, 빅토르는 애써 웃어보였다.

“내가 유리의 교회 주변에 있을 테니까. 광장에 연설 나오면 제일 앞에서 볼 테니까. 만날 수 있을 거야.”

이제는 편한 활동복으로 갈아입은 유리가 고개를 푹 숙이자, 그는 부드럽게 유리를 끌어안았다. 편지에 쓰인 초대 날짜는 3일 뒤였다. 짐을 싸고, 빅토르를 몰래 내보내려면 꽤 촉박한 시간이었다. 당장 내일부터 짐을 싸야 할 판이었다. 3일 뒤의 오후까지 도착하려면, 마차로 4시간정도 걸리는지라 당일 아침에 출발해야했다. 빅토르는 당일 아침이 되기 전, 새벽에 나가기로 결정하였다.

“…빅토르.”

“응.”

나 여기 있어. 빅토르가 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유리는 울상이었지만, 끝끝내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나 없이도 잘 지낼 수 있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요.”

빅토르의 품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는 툴툴거리는 유리의 얼굴에 그는 한가득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여느 때와 같이 좁은 침대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누운 채 속닥거리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거의 유리가 빅토르에게 안긴 꼴이었지만, 그는 이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빅토르의 등 뒤에 난 창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이 그와. 길게 늘어뜨린 그의 은발과 매우 어울려서, 라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다.

“‥키스해줘요, 빅토르.”

그의 말에 빅토르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미약 성분이 들어있는 그의 타액 덕분에 키스한다면 어떻게든 흥분한 그를 달래야만 했다. 그래서 유리는 빅토르에게 지금까지 한 번도 먼저 키스해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별일이네. 유리가 먼저 키스해달라고 하다니.”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요. 원한다면, 내 피를 마셔도 좋아요.”

그가 상의 위쪽 단추를 몇 개 풀어 쇄골을 드러내었다. 달빛에 비추어진 티 하나 없이 깨끗한 그의 어깨와 쇄골에는 유일하게 그의 잇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맛있어 보이는 그의 살구빛 살.

“나, 오늘 밤 잘 생각 없는걸요. 이런 나를 그냥 재울건가요?”

유리의 말에, 이성의 끈이 끊긴 빅토르가 그에게 달려들어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은 건 순식간이었다. 유리는 기쁘다는 듯 웃으며, 벌써부터 달뜬 몸을 아무렇게나 그에게 맡겼다.

 

“짐 다 쌌어?”

“내가 애 인줄 알아요?”

그건 그렇지. 실없이 웃어 보인 빅토르가 깔끔하게 정리된 유리의 방 안을 훑어보았다. 사실 유리의 짐은 씁쓸할 정도로 단출했다. 신부복과 옷가지 몇 개. 성경책. 펜과 조금 두꺼운 노트 한 두 권. 마차 타면서 또 울지 말라는 빅토르의 말에 유리는 살짝 부은 눈으로 그를 살짝 노려보았다. 밖은 벌써 어스름하게 동이 터오고 있었다.

“키스해 줘요.”

입을 부루퉁하게 내민 채 조르듯이 말하는 유리의 모습에 빅토르는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또 흥분하면 어쩌려고. 그리고 곧 출발이야.”

“몰라‥. 그냥. 키스하고 싶어요. 이제 진짜 마지막인데. 해주면 안돼요?”

답지 않은 어리광이 빅토르는 그저 귀여웠다. ‘어쩔 수 없네.’ 라며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짓고는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공예품을 다루듯, 그의 허리를 품에 안았다. 유리의 가느다란 허리는 그의 팔에 들어오고도 한참 남았다.

그가 빅토르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빅토르는 유리에게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몇 번이고 쪽, 쪽거리며 입 맞추다, 어느새 혀가 얽히고 서로를 끌어안은 팔에는 조금씩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유리의 눈은 마치 잠들 때처럼 평온했지만, 눈꼬리에는 작은 눈물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목사님, 이제 출발하셔….”

그에게 편지를 주었던, 이 교회의 또 다른 신부. 이번에 그가 노크 없이 들어온 곳은 유리의 기도실이 아닌, 유리가 묵고 있는 방이었다. 단순히 출발 소식을 전하러 온 것이었지만, 방에서 펼쳐진 광경에 그는 방문을 열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키스장면을 무방비하게 들킨 그들이 급하게 떨어져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5초가량, 정적이 흘렀다.

“이 분은‥?”

대충 상황 파악이 된 남자가 유리에게 물었다. 그리고는, 빅토르를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린 피부. 타원형 동공은 여실하게 그가 흡혈귀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놀란 얼굴은 점점 혐오감으로 점철되기 시작했다. 남자에게 있어서 빅토르는 악마였다.

“흡, 흡혈귀가 왜 교회에‥?”

그것보다, 이 물건이랑 대체 무얼 하신 겁니까? 이번에 남자의 목소리는 분노에 차 있었다. 그를 그냥 빨리 내보낼 걸. 작은 후회가 유리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어떻게 하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도망? 아니다. 아침 예배에 참석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교회 안에서 북적이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변명거리도 통하지 않을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약에 취하기 시작한 유리는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조금씩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무마해야 했다. 이미 빼도 박도 못한다는 것을 미약에 취해있는 유리가 인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제, 가 설명할…수‥.”

유리가 비틀거리는 사이, 그가 몸을 날려 남자의 입을 막고 목 뒤를 강하게 내리치는 바람에 남자는 힘없이 쓰러졌다. 쓰러진 동료 목사가 시야에 들어오자, 유리의 정신은 순식간에 또렷해졌다.

“지금, 뭐‥ 한 거예요?”

“잠시 기절시킨 거야. 가자, 유리.”

“어, 어딜…?”

방금 전의 충격 받은 얼굴 그대로 굳은 유리가 빅토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유리의 얼굴에서 충격과, 걱정, 그리고 두려움을 읽어내었다. 어찌됐던 그는 자신의 존재를 들켰고, 서로의 관계마저 알아버렸다. 저 목사가 깨어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을 테고, 이미 발각된 것을 어쩔 도리는 없었다.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유리 대신 그가 최선책을 판단한 것이었다.

“달아나야지!”

상황이 급박해지자, 빅토르는 그 말을 끝으로 유리를 안아들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얼굴을 숨기기 위해 마련한 망토에 달린 모자가 훌렁 뒤집어져도 그는 상관 않고 달렸다. 모두가 자는 새벽. 모두가 자는 새벽에 유리 몰래 그가 발견한 한적한 길이 있었다. 대낮에도 어둑어둑하고, 그가 길의 끝에 있는 야산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단 한명의 행인도 마주치지 못했다. 인적 없는 데다, 야산과 연결되어 있는 길은 도망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그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일단 교회의 뒤에 있는 산으로 몸을 숨기는 게 먼저였다. 유리는 미약에 완전히 취해, 거친 숨을 내뱉으며 빅토르의 가슴팍부분 옷자락을 꽉 쥐었다. 잔뜩 풀린 그의 눈이 더없이 야살스러웠지만, 그는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빅, 토르…, 읏‥.”

“조금만. 조금만 참아 유리.”

그는 달리면서 수백 번도 자신을 원망했다. 아마 이제까지 한 원망의 배는 될 것이었다. 피를 마셔야만 하는 존재로 태어난 것부터, 키스 한 번이 어려운 자신의 몸까지. 유리에게 발견되어 지금까지 그는 원망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인간이었다면.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가쁘게 내쉬면서 빅토르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어느새 교회를 나와, 사람이 거의 없는 한적한 골목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 골목을 지나면 바로 산이었다.

“빅토르‥. 나, 내려줘요.”

그의 옷자락을 꾹 잡고, 아까보다는 확연히 또렷해진 눈으로 빅토르를 올려다보았다.

“아냐, 유리. 산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아니. 이미 들켰어요. 빅토르.”

유리의 말에 빅토르가 우뚝, 멈추어 섰다. 뛰는 데에만 정신없이 몰려있던 감각이 되돌아오자, 바로 앞 골목과 뒤쪽 골목에서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적어도 대여섯 명 정도의 발걸음 소리였다. 그는 유리를 내려놓고,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도망칠 곳도, 적어도 유리를 숨길만한 곳조차 없었다.

“가요.”

“뭐?”

가라구요. 유리가 그의 가슴팍을 계속 치면서 뒤로, 뒤로 계속 밀어냈다. 망토에 달린 그 모자 쓰면 안 들키고 빠져나갈 수 있어요. 그의 말에 빅토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싫어. 유리 두고는 안 갈 거야.”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는 유리의 손을 다급하게 잡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를 밀어내고 있는 유리의 표정이 어떤지.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인지, 잔뜩 화난 표정인지 빅토르는 알지 못했다. 앞의 골목에서 오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더 요란스러웠다. 빅토르를 본 유리의 동료 목사는 앞의 골목에 합류한 모양이었다.

“안 돼. 둘 다 잡힐 수는 없어요. 빨리 도망가요. 도망가서‥.”

나중에. 나중에 나 빼내러 와줘요. 유리가 고개를 들자,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방울방울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유리는 애써 웃고 있었다. 얼굴 가득 활짝 웃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리는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꽃 같은 미소를 지어냈다. 그의 얼굴에, 빅토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기에.

“가요.”

유리는 마지막으로 그를 밀어내고는, 뒤 돌아 군사들이 뛰어오고 있는 골목으로 자진해서 들어갔다. 골목에서 들려오는 ‘잡아!’라는 호통 소리에,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대로 왔던 길로 달아났다. 주변을 살피면서 오는 병사들은 구석에 숨은 빅토르를 눈치 채지 못하고 지나쳤다.

“유리.”

내 사랑스러운 신부님. 구석에서 숨을 골라내자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쿠아마린이 박힌 그의 눈에서 다이아 같은 눈물이 쉼 없이 흘렀다.

“유리. 유리….”

구해야만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마을은 이제 그를 잡아내기 위해 온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다닐 것이었다. 하지만 빅토르의 소재를 알고 있는 것은 유리뿐이었고,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입을 열지 않을 것이었다. 최소 3-4일 정도는 시간이 있었지만, 그는 그 시간동안 유리가 겪을 고통에 마음이 급해졌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지막 눈물을 소매로 훔치고, 그는 빠른 걸음으로 골목 속으로 사라졌다.

 

“허윽, 으…!”

마을의 수용소. 차디찬 바닥에서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돌로 된 벽에 박힌 쇠사슬은 그대로 내려와 유리의 손목에 묶인 끈과 연결 되었다. 쇠사슬이 짧아, 며칠 째 두 손을 모으고 팔을 번쩍 들고 있는 자세로 있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까지 유리가 받은 것과 비교하면 가벼운 고통이었다.

얼마나 고문을 당했는지, 그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처음 잡힌 날로부터 6일. 빅토르를 잡지 못한 교회는 그에게 온갖 고문을 하면서 그의 소재와, 생김새를 상세히 말하라고 다그쳤다. 고문이 통하지 않자 그들은 유리를 굶기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물조차 마시지 못하고, 밤낮 없이 고문을 당하니 그는 몸도, 정신도 남아나지 않았다.

“빅토르….”

언젠가 구하러 오겠지. 그도 지금 안절부절 못하고 있겠지. 자유롭게 활동하지도 못해 정보를 모아 유리에게 오는 데에는 일주일정도 걸릴 터였다. 그때까지 버티는 것이 유리의 몫이었다. 원래 그가 감옥에 있어야 할 시간은 길어봤자 사흘이었지만, 정보를 부는 척 하면서 간당간당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는 정말이지 숨이 끊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나와.”

열쇠 꾸러미를 들고 와 감옥 문을 연 간수가 턱짓했다. 그가 온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자, 그의 팔목에 연결된 쇠사슬을 풀고 그가 끄는 대로 끌려갔다. 날이 밝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 또 고문당하겠지.

“어, 디로 가는 건가요?”

“닥치고 따라와!”

간수가 데려간 곳은. 원래는 그가 깔끔하게 씻고, 주름 하나 없는 신부복을 입은 채 기도를 드리고 있어야 할 주교회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주교회의 종교 재판소였다.

“데려왔습니다.”

유리를 재판소에 밀어 넣고, 간수는 재판소를 나갔다. 어안이 벙벙해진 유리가 멍하니 재판소를 휘 둘러보았다.

높아서 끝이 없는 것만 같은 높은 돔 형식의 천장. 좌우에 온갖 목사들과 시민들이 앉아있고, 그들은 전부 유리의 등장에 술렁이고 있었다. 아, 나 오늘 재판 받는 구나. 유리의 멍한 머리에서 이 생각이 스쳤다. 중앙에는 이 주교회의 수장으로 보이는, 근엄한 표정의 목사가 앉아 있었다.

“죄인, 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라.”

남자의 말에 그는 고분고분 재판소의 중앙에 앉았다. 양 옆에는 술렁이며 야유를 던지는 사람들. 앞에는 자신을 혐오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죄인. 죄인은 진실로 악마와 정을 나누고, 몸을 섞었는가?”

아. 그의 말에 유리는 또다시 그의 생각에 눈물이 차올랐다. 빅토르는 뭘 하고 있으려나. 자신과 만나기 전처럼, 어디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돌아다니고 있을까. 어디서든 정보를 얻으려고 밤낮 안 가리고 바삐 뛰어다니고 있을까.

“뭐든 좋으니, 아프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대답하시오, 죄인!”

눈꼬리에 작은 눈물을 매달고 그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고개는 들지 않은 채, 그를 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그의 눈에 남자는 움찔, 떨었고 옆의 사람들은 수군대기 바빴다. 그는 이제 침묵하는 것에 지쳐 있었다. 몸을 섞었느냐는 질문은 아마 소문이 와전되어 남자의 귀에 들어간 것이겠지만, 그는 이제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요. 저는 빅토르를 사랑합니다. 그와 매일 밤 관계를 가졌고, 지금도 그 사람 걱정뿐입니다.”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재판관한테 또박또박 소리쳐 전하자, 남자는 눈을 치켜뜨더니 점점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뿌득, 하고 이를 가는 듯 싶었다. 그의 말에 재판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놀라며, 그에게 온갖 야유를 퍼부었다.

“악마다! 악마에 씌여 있는 게야!”

“죽여! 화형이다!”

“조용! 조용!”

하지만 재판관의 말에도 사람들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군중들의 야유 속에서, 재판관은 황급히 판결을 내렸다. 그는 아무래도 유리를 먼저 처형시키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죄인은 신을 섬기는 몸임에도 행동을 정실히 하지 못한 점과, 악마와 정을 나누고 몸을 섞었음에도 한 치의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 이에, 죄인에게는 최고형인 화형을 선고한다!”

 

“그거 들었어? 전에 그 목사, 화형이래.”

“그럴 만도 하지. 감히 하느님을 모시면서….”

빨랫감을 들고 쑥덕이던 유모들의 옆을 지나가던 남자가, 급하게 여자의 팔을 붙잡았다. 짧게 자른 은발. 남자의 눈은 모자 속에서도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여자에게 다시 말해 주지 않겠냐고 말했다.

“예? 예에…. 그‥목사. 화형이래요. 저, 전에 악마랑 지냈다던, 그….”

모자 속의 어둠에서 푸른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린다. 그가 지낸다던 교도소의 감옥 위치까지 알아낸 상태였다. 간수가 교체되는 시간이 있다는 정보를 얻고, 그것이 몇 시인지만 알아내면 되는데.

‘유리.’

 

다시 감옥으로 돌아온 유리는 멍하니 해가 저무는 것을 보고 있었다. 해가 저물면, 그는 성 안의 광장에서 화형 당한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다만, 숨을 들이쉬면서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의 생각을 한 줌 삼켰고, 숨을 내쉬면서 가슴에 남은. 이렇게 일이 꼬이기 시작한 첫 날의 아주 작지만, 큰 후회를 한 줌 씩 태웠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이제는 빅토르가 그를 구출해낼 방법을 찾는 것을 그만 두길 바랄 뿐이었다. 화형이 선고된 지금, 그가 이곳에 들이닥치면 그도 꼼짝없이 타 죽을 게 뻔했다.

밖과 연결된 감옥의 창살 사이로 보이는 건, 민간인의 집보다 훨씬 높고 큰 짚더미였다. 마녀나, 타락한 성직자들에게는 저런 짚더미를 만들어 안에 넣고 불을 붙이는 게 처형 방식이었다. 붉은 노을빛에 짚더미가 마치 타오르는 것만 같은 느낌에 유리는 실없이 웃었다. 이렇게 죽는 인생이지만, 그 사람이라도 계속 살아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 라고 그는 짧게 생각했다.

“빅토르, 사랑해요. 사랑해요….”

전해질리 없는 고백을 중얼거리며, 그는 차분하게 집행 시간을 기다렸다.

‘빅토르한테 사랑한다고, 한 번이라도 말해줄걸.’

 

그럼에도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 어느새 해가 저물고, 하늘은 붉은 색이 아닌 온통 보랏빛이었다. 두 손이 묶인 채, 그를 집어삼킬 듯 솟아있는. 마른 나무와 짚으로 만든 처형장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의 처형 장면을 보기위해, 일손을 모두 마친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덤덤하게 걷는 유리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 안에는, 빅토르 또한 있었다.

그는 광장에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불안한 마음에 그곳을 살피다가 유리를 발견한 것이었다.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는 인파들을 빅토르는 다급하게 헤치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만…!”

그의 머릿속에는 이제 어떠한 계산도 남아있지 않았다. 유리가 저 곳에 올라가고, 불을 당기는 사람이 사다리를 치우면 그가 손 쓸 틈도 없이 유리는 저 안에서 타죽는다. 그럴 수는 없었다. 이미 후회할 짓을 몇 번이나 저질렀다. 이대로 그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빼내야만 했다. 일단 간수가 쥐고 있는 유리 수갑과 연결되어 있는 끈. 그것을 먼저 뺏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새 사다리를 오르고 있었다.

“안 돼!!”

마치 단말마와도 같은. 그의 외침이 사람들의 야유 속에 덧없이 묻혔다. 어느새 그는 군중 속의 맨 앞에 다다라 있었다. 불을 당길 사형수는 유리를 짚더미 안에 넣고, 불을 가져오기 위해 잠시 자리를 뜬 모양이었다. 처형장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를 사람들이 붙잡았다.

“지금 뭐하는 거야! 불을 당기면 저 미친놈이랑 꼼짝 없이 타죽는다고!”

“이거 놔! 유리!!”

이제 그에게 이성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절규와도 같은 그의 외침이 이번에는 처형장 안에 완전히 들어간 유리의 귀에 들렸다.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가 이제껏 제일 듣고 싶어 했던 목소리였기에.

사형수가 있는 공간. 그 안에 밖을 향해 뚫려 있는 작은 구멍을 향해, 그는 두 손이 묶였음에도 어거지로 몸을 일으켜 달렸다. 구멍은 그가 얼굴을 내밀기에 충분히 컸다.

“빅, 빅토르‥!”

군중들의 맨 앞에서, 사람들에게 붙잡혀 절규하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빅토르의 팔을 잡은 손아귀 힘이 느슨하게 풀리자 그는 미친 듯이 달려 처형장의 뒤에서 사다리를 다시 대어놓고, 그 위로 올랐다.

“유리!”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 끌어안은 빅토르의 눈에는 작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유리 또한, 그의 품에 계속 파고들며 빅토르의 체향을 마음껏 폐부 깊숙이 담았다.

“왜, 왜 이제 왔어요. 왜‥.”

빅토르 만이라도 살아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 는 생각은 본인의 앞에서 너무나 가볍게 무너져버렸다. 사실은 그가 무리를 하면서라도 와줬으면 싶었다.

순간, 바깥에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아래쪽에서 불을 가져온 모양이었다. 유리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사람이 짚더미 앞에서 불을 받아들었다.

“들려요? 저 사람이 뭐라고 말하는지.”

“응. ‘악마를 처단하여 마을을 지키자.’ 라고 말하고 있어.”

푸흐, 언제 그랬냐는 듯 그들은 절박함은 사라지고 각자 눈앞의 사람에게 집중했다. 그의 망토에 달린 모자를 벗겨내자, 이전과는 다른 짧은 머리칼이 찰랑였다.

“머리, 잘랐어요?”

“응. 은발이 기니까 눈에 띄어서.”

‘난 빅토르 머리 긴 게 더 좋은데.’ ‘그래서 싫어?’ ‘아니. 좋아요.’ 의미 없는 대화가 오가고, 그는 다시 빅토르의 품에 안겼다. 밖에는 목사가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그에게는 마을에서 악마를 색출해내고 타락한 성직자를 벌하는 자신의 교회의 위대함을 알릴 기회였다.

“이렇게 보기 전까지는, 빅토르라도 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어. 사실은 엄청 야속했다구요.”

“미안해. 늦게 와서.”

빅토르가 유리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그 다음엔 유리가 빅토르에게 입 맞추고, 평소와 같이 입맞춤은 자연스럽게 혀를 얽고 타액을 섞어내었다. 부드럽고 깊은 키스. 서로에게 조금 더 닿고 싶었다. 못 본 만큼. 그만큼만 같이 있고 싶었다.

천천히 입술이 떨어지고, 빅토르는 연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다음 생에는.”

“응?”

조금 가빠진 호흡을 고르며, 그가 느지막이 속삭였다. 바깥의 함성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들에게 들리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뿐이었다.

“다음 생에는, 우리가 마음껏 사랑했으면 좋겠어요.”

“신이 있다면, 분명 그렇게 해줄 거야. 그때는, 내가 더 이상 유리의 발목을 잡지 않았으면 좋겠어. 유리를 끌어올려 줬으면 좋겠어.”

“좋아요. 내가 평생을 담아 동경하고 있을 테니, 끌어올려 주세요.”

푸흐흐. 유리가 실소를 터뜨렸다. 빅토르가 마주한 그의 눈은, 앞으로 닥쳐올 죽음의 공포보다는 빅토르에 대한 사랑이 넘실거리는 눈이었다. 그것은 아마 빅토르 자신도 다르지 않을 터였다.

“…사랑해요. 빅토르.”

“나도 사랑해.”

 

“ㅡ해서. 우리 모두 악마와 악마에게 씌인 미치광이 목사를 처형합시다!”

어느새 날은 완전히 저물어, 거리를 밝히는 횃불이 곳곳에서 불타고 있었다. 앞에서 3분가량 연설을 하던 남자가, 들고 있던 횃불을 짚더미에 던졌다.

순식간에 붙은 불은 꼭대기까지 타고 올라가 짚더미 전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환호했고, 은하수가 촘촘히 박힌 밤하늘에 붉은 화염이 넘실거렸다.

 

 

 

 

Se c'è Dio, non punirli, ma permettano il loro amore.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들을 벌하지 마시옵고,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DESIGNED BY. ALLO  ( @invernogiallo )   < YURI ON ICE, HALLOW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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