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빅토카츠> Salome By 글룸 (@GlooM_suicide )
대답해 봐, 살로메.
나의 구원은 언제쯤이지?
웬 밧줄이에요. 빅토르를 처음 본 유리가 대뜸 말을 던졌다. 목에 감긴 군데군데 올이 풀린 두꺼운 밧줄은 남자치곤 예쁘게 생긴 빅토르의 목선을 감고 있었다. 남자는 예의 그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썹 한 쪽을 올렸다. 눈을 찡긋거리는 그의 표정을 가만히 보다 유리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할로윈이잖아, 한 마디가 공간을 웅웅 울렸다. 유리는 그 말에 벽에 걸린 시계를 흘긋 보았다. 로마자로 씌어진 숫자 사이를 어지러이 도는 바늘이 오후 열한 시 정각에서 1분 즈음 지난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아슬아슬했네요. 아까부터 고민하던 게 이거였나 봐요. 웃음기 섞인 대꾸를 하고는 유리는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유리, 유리는 뭐 안 해?
저는 그런 거 잘 못 해요, 알면서.
나처럼 간단하게 교살당한 시체는 어때?
말은 바로 해야죠, 빅토르. 타살이 아닌 것 같은데요.
빅토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유리는 그 모습을 조금 무감각하게 보다 제 목께를 더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밧줄은 제 심미안에 차지 않았다. 허옇게 죽어 껍질이 올라온 입술을 혀를 내어 핥아 축이고는 언어를 내어놓았다.
살로메 이야기는 어떨까요.
남자는 생전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눈을 조금 둥그렇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흔한 분장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뱀파이어나 좀비 같은, 2류 공포영화 등에 흔하게 등장하는 소재도 아닐뿐더러 평소에 많이 듣는 이름도 아니었다. 빅토르는 제 연인에게 물었다. 유리, 살로메가 뭐야? 혹여 제가 알지 못하는 일본 옛날이야기인가 싶어 물은 것이었다. 그러면 유리는 대답했다. 살로메는, 성서에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치게 만든 죄 많은 여인. 일곱 베일의 춤을 추어 지배자를 홀려 요한을 죽인 과정을 다룬 게 이야기에요. 그의 설명은 애초에 빅토르가 추측했던 것처럼 일본과는 거리가 상당히 먼 것이었다.
그럼 유리는 그 여인으로 분장할 거야?
아뇨, 잘린 요한의 목으로요. 살로메가 어울리는 사람은 따로 있죠.
유리는 예쁘니까 여장을 해도 잘 어울릴 거야, 위화감 따윈 없겠다. 키득이며 말을 이어나가던 빅토르는 잠시 멈칫했다. 돌아온 유리의 대답이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었다. 잘린 목으로 저를 분하겠다는 대답에 남자는 몇 초간 말이 없다가 이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렇게 하려면 수준급의 분장 솜씨가 필요하겠는데? 유리는 고조곤히 대답했다. 글쎄요, 잘 노력하면 저 하나로도 될 것 같아요. 빅토르는 그 말에 유리의 어깨를 도닥여 주려다 손을 거두었다. 굳이 자신의 격려 없이도 잘 해낼 사람이었다. 그 큰 대회에서도 제 역량을 펼쳤는데 겨우 샴하인의 분장에서 겁을 먹을까. 그저 고개를 끄덕인 빅토르는 아무 말 없이 제 뒤에 길게 늘어진 밧줄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다. 피를 더 묻히는 편이 실감났으려나, 생각하며 손에 배배 꼬았다. 가는 손가락에 억지로 몇 번 묶여진 굵은 끈이 이질적이었다.
오늘 약속 같은 것, 없지?
할로윈 파티에 오라고 한 사람들은 많았는데,
운을 떼며 유리가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별로 끌리지 않아서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집에만 있는 게 더 편하기도 하고. 빅토르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휴일에는 어디 안 가고 침대에 누워 있는 게 가장 좋아. 항상 누워 있는걸요, 뭐. 유리가 대꾸하고는 가만히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빅토르는 아무 말 없이 제 연인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밖엘 도통 나가지 않은 탓인지 유난히 피부가 죽어 있었다. 햇빛이 유리의 얇은 피부를 통과하여 녹빛과 푸른빛, 보랏빛의 핏줄을 여과 없이 보여내는 것에 시선을 고정했다.
언젠가부터 카츠키 유리는 어딘가에 나가는 것을 꺼려했다.
그건 오래 전 일이 아니었다. 빅토르는 처음으로 유리가 뱅큇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제게 주장한 날을 기억한다. 세계 선수권 대회가 끝나고 당연하다는 듯 양복으로 갈아입으라는 제 말에 거부한 날을 떠올린다. 나는 그런 곳에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아요, 조명이 너무 세고, 사람들도 너무 많아. 유리는 그 대회에서 동메달을 따냈다. 금메달은 자신의 코치에게, 은메달은 러시아의 동명이인에게 돌아갔다. 옅은 금발 머리의 루키는 동메달을 손에 쥔 유리의 앞에서 알짱대며 약을 올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일렁이지 않았다. 빅토르는 뱅큇 전날 그가 했던 행동을 후회했다.
유리, 나 없이 네가 이 곳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빅토르.
내가 너의 코치가 되겠다고 일본까지 가지 않았다면 너는 영원히 이류 선수에 머물러 있었을 거야. 점프도 못 뛰어, 경기 때 긴장은 있는 대로 다 하고 그러면서 팬들에게 서비스도 제대로 할 줄 몰랐지. 그런데 지금 와서 하는 말이, 내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고?
엄연히 말하자면 유리는 그에게 ‘도움 따위’라는 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당신의 도움 없이 이젠 제 힘으로 해 보겠다고 자립심을 표명했던 언어가 그렇게 왜곡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때는 그렇게 작은 것들을 고려할 상황이 아니었다. 저도 그 순간은 잠시 이성을 놓았던 것 같았다. 유리는 고요한 분노에 찬 빅토르의 말을 듣고도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분명 무언가 그의 폐부를 찔렀던 게 틀림없었다. 말이 끝나자 유리는 평소와는 다르게 공손하게 사과했다. 제게 허리 굽힌 까만색 정수리를 보면서 빅토르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아, 짜증나게 이 순간까지도 예쁘다는 생각이었다. 로맨틱할지는 몰라도 하등 쓸모없는 상념. 켜켜이 쌓인 침묵을 뒤로 하고 유리는 잘 자라는 인사를 남겼다.
그날 밤 파티에 혼자 참석한 빅토르에게 크리스가 다가왔다. 네 연인은 어디 두고 홀몸이야. 몸이 안 좋다는데. 저런, 안 가 봐도 돼? 혼자 가래. 별 의미 없는 대화가 허공을 떠돌았다. 이내 크리스는 제 음악을 맡아 준 감독을 만나 웃으며 자리를 떴다. 불편한 마음으로 샴페인이며 와인, 갖은 양주들을 속에 쏟아 붓다 보니 어느 새 제 호텔 방에 와 있었다. 술냄새를 가득 풍기며 안에 들어가 보니 유리는 킹사이즈 침대에 곧은 자세로 앉아 제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창문에 그의 얼굴이 반사되어 비쳤다.
놀랐잖아, 유리.
왔어요?
너도 갔으면 재미있었을 뻔했어.
이런 몸으로 어딜 가요.
어깨를 으쓱이느라 조금 흘러내린 옷자락 사이로 보인 유리의 피부는 창백하다 못해 푸른빛을 띠었다. 정말로 심각한가 싶어 그에게 손을 뻗자 유리가 유연한 몸놀림으로 일어나 그의 손길을 피했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에요. 어서 자요, 술 냄새 나요.
그래, 그 날부터였던 것 같다. 그 날을 기점으로 그들 사이의 무언가가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사실 붕괴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빅토르. 빅토르는 누군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무의식중에 계속 몸에 남는 밧줄을 감아댔던지 왼쪽 팔뚝은 온통 밧줄로 칭칭 감겨 있었다. 미라 같잖아, 중얼거리며 뱉고는 유리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유리가 조금 웃었다. 할로윈의 끝이에요. 아까 자정을 알리는 네 번째 종이 쳤어. 유리가 그 말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 거실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을 괘종시계가 다섯 번째의 종을 울렸다. 할로윈 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시간이었다. 시계가 열두 시를 알리는 동안 영혼들은 인간들의 세계에서 가장 견고해졌다. 유리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입을 열었다.
여섯, 빅토르. 아무리 생각해도 교살은 너무 진부했어요.
일곱, 나랑은 다른 방법으로 죽으려고 해야죠.
여덟, 나는 아직도 손자국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는데.
아홉, 이제 364일 동안 나 없이 지내야겠네요.
열, 작별의 키스는 네 마지막 숨을 훔쳐 가는 걸로 대신할게요.
열하나, 빠른 시일 내에 너도 내가 있는 나락으로 와요.
시계가 마지막 열두 번째 종을 울리는 소리가 잔음으로 웅웅 울렸다. 전자 달력은 재빠르게 10월의 마지막 날에서 11월의 첫째 날로 숫자를 바꿔 끼웠다. 온통 1이 가득한 날이었다. 빅토르는 어제 하루 종일 씻지 못해 조금 끈적한 몸을 무겁게 일으켰다. 부자연스러워 흘긋 본 팔에는 밧줄이 감겨 있었다. 제 목을 더듬어 굳게 매듭진 밧줄을 풀어낸 그는 멍한 눈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공기 중에는 제법 크게 무리를 형성한 먼지 덩어리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집 안 어디에도 타인의 흔적은 없었다. 빅토르는 왜 제가 목에 줄을 감고 있는지 기억을 해내지 못했다. 눈썹을 슬쩍 찡그리며 그는 거실로 나갔다.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저보다는 조금 작은 발자욱에 무심코 한 걸음을 내딛으려다 멈추었다. 가슴에 무언가가 얹힌 듯 답답했다. 아무리 차가운 공기 속에서 점프를 뛰더라도 시원하게 내려가지 않는 이물감이었다.
이번 년도의 할로윈은 이렇게 지나갔다. 올해의 10월 31일에도 그의 연인은 찾아왔으며 흔적을 남겼다. 떠나기 몇 초 전에 그가 제게 했던 행적들을 낱낱이 상기시켜 주었고 저를 기다린다 말했다. 손에 아직까지 쥐고 있었던 밧줄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트렸다. 오랜 시일이 지난 지금도 빅토르는 후회한다. 제 연인의 목이 한 손에 온전하게 들어 왔을 때 멈추었어야 했다는 늦어 버린 후회였다. 아마 다음 년도에도 그는 검은 머리 남자를 맞이하기 위해 기발한 분장들을 생각해낼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겪은 그의 심사위원은 짠 점수를 줄 것이고, 그 둘은 시덥잖은 이야기로 애써 무언가를 감추려 필사적으로 노력할 것이다. 할로윈은 그에게 최고이자 최악의 날이었다. 잘린 요한의 목은 식식대며 신성한 음역대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참으로 비극적이었다.
살로메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