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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카츠빅토>  기다리는사람.  By TR(@TRistezza0810)

하늘에서 붉은 색이 거의 사라질 무렵, 입구에 들어섰다.
바스락 소리를 내며 밟히는 낙엽들.
코를 찌르는 풀냄새.
밤바람을 맞은 피부가 차갑게 식어간다.
빨개진 코 끝. 둔해진 손가락.
올려다 본 하늘은 가지와 잎들로 빽빽하게 가로막혀 새까말 뿐.
발바닥에 닿는 풀의 느낌.
오랜만에 느끼는 이 감각이 반가워 괜히 몇 번씩 걸음을 늦춘다.
또박또박 천천히 뚜벅뚜벅 천천히.
드디어 숲을 빠져나오면 보이는 것은 잔디로 뒤덮인 곳.
완만한 경사의 낮은 언덕과 그 위에 위치한 하얀 정원.
그리고 정원에 입구에는, 당신이 있다.
지난 오늘, 지지난 오늘처럼 이번 오늘도.
당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이미 한 손으로는 다 셀 수 없을 만큼 이전의 이야기.
오늘. 이 곳. 이 순간에. 나는 당신을 만났다.
내가 당신을 본 계기는 누가 들으면 웃을지도 모를 정도로 단순했고 특별할 게 없었다.
단지, 당신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걸어 도착한 낯선 숲, 그 너머에 당신이 있었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은색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였다.
밤이라서 그런지 투명한 피부가 유난히 더 하얗게 보였다.
어두운 밤, 하얀 정원의 입구에 기대고 있던 아름다운 사람.
흔히들 말하는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 매혹되어 나는 당신에게 다가갔다.
한걸음, 다시 한걸음, 또 다시 한걸음.
정신을 차린 건 당신에게 너무 많이 다가간 후.
당신의 눈에 비친 나를 보고 나서다.
푸른 눈. 하늘, 바다, 유리, 아무것도.
투명한 푸른 눈이 나를 똑똑히 비추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당신이 나를. 둘이 서로 말없이 마주보았다.
마주보다가, 계속 마주보다가.
마침내 입이 열렸다.
  
-내가 보여?
  

  
가만히 머리를 기댔다.
어깨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늘은 완전히 어두운 색.
광원은 둥근달 하나 뿐 이지만 조금도 불편하지 않다.
  
당신과 만나기로 한 오늘.
당신과 만나는 오늘.
당신과 만난 오늘.
일부러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다만, 너와 만나고 혹시 몰라 또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이 곳 에 와서.
그리고 처음 만난 그 날처럼 여기 서 있던 당신을 봐서.
그렇게 한번, 한번, 한번.
어느새 이 날, 이 곳, 이 순간 나와 당신이 만나는 것은 암묵적인 약속이 되었다.
  
당신이 내 어깨를 감싸 주었다.
나는 당신의 어깨에 고개를 고쳐 기댔다.
  


몸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쓰러졌다고 말했다.
잠들었다고 말했다.
이름이 뭐냐고 말했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믿고 있었다고 말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몸이 아프다는 것을 숨기고 있다가 쓰러져버렸다고 말했다.
쓰러진 채로 결국 오래오래 잠들어 버렸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름을 물어봐도 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
모른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말했다.
계속 말했다.
계속 말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
내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
기다려줘.
  
기다릴게.
  

  
당신은 변하지 않았다.
당신은 변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았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과거에도, 미래도, 아마 앞으로도.
당신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을 거다.
  
변하지 않아줘서 고마워.

...

어째서 고마운 걸까.
  

  
곧 해가 뜰 것이다.
어둡던 밤하늘도 점점 색이 옅어져 간다.
이제 헤어질 때.
바람이 다시 불어온다.
당신이 안아주었을 때는 그렇게 따뜻했는데.
데워졌던 몸은 찬바람 하나에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맞잡은 손끝이 투명해진다.
슬슬 시간이 되었구나.
작별인사를 하자.
재회를 믿고 있는. 다음을 기약하는.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기억하지 못 하는 사람을 보내주는.
남겨진 사람이 떠나는 사람을 보내주는. 
그런 인사.
  
당신의 얼굴을 본다.
웃으려는 것 같고, 울려는 것 같고, 아파보이는 것 같고.
그런 주제에 초연해 보이는, 이상한 표정.
  
인사에 쓸데없는 말은 필요 없다.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단지 웃을 뿐.
지나가버린 1년을, 다시 지나갈 1년을 위해서, 단지 웃을 뿐.
  
내가 웃었다. 당신이 웃었다.
  
-그럼 안녕.
  
나는 기억하지 못 하는 이름.

-빅토르.

당신이 첫 만남에서 알려줬던 이름을 부르며.
나는 그 곳으로 돌아갔다.




 



 side. V
  
믿고 싶지 않았다.
믿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 곳에 갔다.
죽은 자들이 살아 돌아온다는 그 날에, 네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기다렸다.
기적을 믿으며 기다렸다.
기적은 일어났다.
비록 네가 그 이전의 일들을 모두 잊었더라도 상관없었다.
네가 너를 잊었더라도 상관없었다.
네가 나를 잊었더라도 상관없었다.
지금 너는 이곳에 있으니까 상관없었다.
  
너는 매년 나타났다.
나는 매년 기다렸다.
너는 잠들기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 했다.
하지만 그 후 나와 만난 일들은 기억 했다.
  
너는 변하지 않았다.
잠든 날 이후로 전혀 변하지 않았다.
나는 변했다.
그 날보다 훨씬 늙어 버렸다.
하지만 다행히 너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기다린다.
나는 기다린다.
내년을 기다린다.
내후년을 기다린다.
계속 기다린다.
내가 기다릴 수 있는 건 이 정도 뿐.
당장이라도 너를 따라가고 싶지만, 그럼 네가 화를 낼 거라고 말했으니까, 하지 말라고 말했으니까.
부탁이야.
앞으로 몇 년 어쩌면 몇 십 년.
내가 잠이 들 때까지 기다려줘.
네가 기다릴 시간에 비해 내 기다림은 짧고 보잘 것 없지만.
부탁이야, 기다려줘.
내가 너를 만날 수 있을 때 까지.
1년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 너와 함께 있을 때까지.
내가 너의 곁으로 갈 수 있을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줘.
  
나는 다시 기다린다.
너를 다시 보내고, 네가 사라진 그 곳에서, 다시 너를 기다린다.
  
-유리.
  
네가 기억하지 못 하는 너의 이름을 부르며, 나는 기다린다.
  
불어온 바람에 옷자락이 휘날렸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반지가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 여러번 읽는 것을 전제로 쓴 글입니다. 더 나은 이해를 위해서 다시 한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DESIGNED BY. ALLO  ( @invernogiallo )   < YURI ON ICE, HALLOW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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